지혜의 등불 - The World of Wis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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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명-하심회 한줄 메모에서 가져옴
 집주인  01-06 | VIEW : 495
하심회 사이트 한줄 메모에 며칠 걸러 하나씩 실려 음미하던 신심명 풀이를 모아보았습니다. 무비 스님의 해설을 읽고 제가 몇 마디 어줍잖은 감상을 붙이기도 하고 하던 글의 모음입니다.
  
신심명[信心銘]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으며 오직 간택함을 싫어할 뿐이다.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는 일만 하지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

신심명의 첫구절입니다.
나의 틀[Frame of Reference-즉 자신의 패러다임]에 의해 간택하지 않으니, 미워하고 사랑하는 일이 다 중도[中道]에 이르러 사라집니다. 눈에 헛꽃[空華]이 없어지니 어찌 환하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毫釐有差 天地懸隔 欲得現前 莫存順逆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처럼 벌어진다.
(도가) 앞에 현전現展하기를 원하거든 순경계도 역경계도 두지 말라.

어렵지 않다, 통연 명백하다, 깨달은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근사법칙을 진리로 믿고 사는 태도로는 어림없다는 것입니다. 假我 중심의 삶을 버리지 못하는 凡人의 기준으로는 너무 어려운 일이지요.
지극한 도를 이야기하는 중입니다. 무비 스님은 이상적인 삶, 절대적 자유와 행복이 펼쳐지는 삶을 도道가 현전現展하는 삶이라 풀이했네요. 실은 삶이란 표현도 어울리지 않네요. 생사가 끊어진 자리, 불생불멸을 이야기 하는 자리인데요... 어쨌거나 거기를 엿보기라도 하려면 순경계, 역경계에 다 끄달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행할 때 역경계[내가 어려움을 견뎌내는 것]은 오히려 쉽다는 것이지요. 순경계, 즉 내게 달콤한 것, 내 생각에 척척 맞아떨어지는 것이야 말로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가 가리킨 길도 가지 않는 것입니다.

違順相爭 是爲心病 不識玄旨 徒勞念靜
어긋남과 순함이 서로 다투면 이것이 마음의 병이 된다.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한갓 수고로이 고요하고자 할 뿐이다.

違는 逆과 같은 뜻으로 썼습니다. 순역심順逆心을 두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밝힌 것입니다. 마음의 병을 갖고서 구경究境을 추구하는 수행을 어찌 올바로 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위순違順이 서로 다투지 않는 자리는 이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해야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중도中道의 세계란 違順의 중간을 말함이 아니라 이와 같은 새로운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앞의 '위순...심병'을 받았습니다. 病, 靜으로 압운을 맞추었지요? 마음의 병을 해결하지 못하고 참선자리에 앉은들 무얼 합니까? 존재의 원리가 중도임을 보지 못하니 부질없이 참선한다고 고요히 앉기를 즐기나, 기와장 갈아 거울 만들기라는 것입니다. 도로徒勞아미타불이란 말이 여기서 나온 듯 합니다.

圓同太虛 無欠無餘 良由取捨 所以不如
원만하기가 태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으나,
진실로 취사심으로 말미암아 그 까닭으로 그러하지 못하다.

중도의 삶을 깨치고 보면 지극한 도에 합치하므로 원만하여 부족함도 남음도 없는 것이 당연하나, 취하고 버리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莫逐有緣 勿住空忍 一種平懷 泯然自盡
유연도 좇지 말고 공인에도 머물지 말라,
한 가지로 마음에 품으면 민연히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

有緣이라고 한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하기 때문에 緣자를 붙였습니다. 또 空한 것은 드러난 것이 아니므로 숨어 있다는 뜻에서 空忍이라고 한 것입니다. 一種平懷는 한 가지를 바르게 지닌다, 泯然自盡이란 차츰 스러져 저절로 없어진다는 말이지요. 있음도 좇지 않고, 공에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 中道입니다. 이처럼 자유자재로 有와 空을 한 가지로 품는다면[一種平懷] (패러다임의 차원이 바뀌므로) 유와 공에 따르는 문제도 다 저절로 없어진다[泯然自盡]는 것이지요.

止動歸止 止更彌動 唯滯兩邊 寧知一種
움직이는 것을 그쳐 그친 데로 돌아가면 그쳐 있던 것이 다시 두루 움직인다.
오직 양변에 막힘이라 어찌 한 가지임을 알 수 있겠는가?

움직이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 道를 修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짚었습니다. 움직이고 그치는 것이 곧 有를 좇고 空에 머무는 것과 같은 兩邊에 막힘이니, 어찌 그 차원에 머물면서 움직이는 마음, 그치는 마음의 功能이 하나인 줄을 알겠습니까?

一種不通 兩處失功 遣有沒有 從空背空
한 가지임을 통하지 못하면 두 곳에서 그 공능을 잃어버린다.
유를 보내면 유에 빠지고 공을 따라가면 공을 등진다.

수행하는 자를 위하여 앞의 이야기를 간절히 되풀이 하였습니다. 엊그제 미국에서 온 리더 코치와 함께 코칭 워크숍을 가졌는데, 그 수준의 차원에서도 Being, Doing, Having 의 담론이 진지하게 논의되었습니다. 有를 보내는 것이나 空을 따라가는 것은 Doing 이니 그 결과로 얻는 것은 Having 입니다. Being에도 접근할 수 없으니 그 초월을 운위할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이 자명합니다.

多言多慮 轉不相應 絶言絶慮 無處不通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상응하지 못한다.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못할 데가 없다.

인간의 두뇌는 거짓말을 하기 위해[하느라고] 발달했다고 하는군요. 말이 많으면 진실과 멀어집니다. 말을 끊고 생각마저 끊으면 무처불통, 다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부처의 법은 '바로 보고 바로 알라', 그뿐입니다.

歸根得旨 隨照失宗 須臾返照 勝却前空
근본에 돌아오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지를 잃어버린다.
잠시라도 비춤을 돌이킴이 앞 경계를 비움보다 수승 하리라.

돌아온다는 말이나 돌이킨다는 말이 모두 밖의 경계가 아니라 나 안으로 들어오는 의미입니다. 부처를 밖에서 구하지 말고 내 안에 있는 이 순간의 부처를 바로 보라는 말씀과 다름 아닙니다.

前空轉變 皆由妄見 不用求眞 唯息所見
앞의 경계가 공하여 변하는 것은 다 망견을 말미암은 것이다.
참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소견을 쉬어야 하리라.

잘못된 공부의 폐단을 경계하여 空에도 빠지지 말고 眞妄에도 빠지지 말아 오직 所見을 쉬어 아무 일이 없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二見不住 愼莫追尋 纔有是非 紛然失心
두 가지 견해에 머무르지 말며 삼가 좇으며 찾지 말라.
막 옳고 그른 것이 있기 시작하면 어지러이 마음을 잃으리라.

두 가지 견해란 서로 상대적인 견해를 말합니다. 옳고 그름도 그것이지요. 마음은 근본자리 一心을 말했습니다.

二由一有 一亦莫守 一心不生 萬法無咎
둘은 하나를 말미암아 있는 것이나 하나 또한 지키지 말라.
한 마음이 생기지 아니하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二는 앞의 二見不住에서 나온 二입니다. 이견은 一心을 말미암은 것인데, 그 일심마저도 지킬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中道, 一心이 다 불러 놓으면 이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이름 지을 수 없는 것 그 하나로 인해 보고 듣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을 공한 것으로 알고 그 공함에서 한량 없는 작용이 일어남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眞空妙有, 있다고 해도 허물이요, 없다고 해도 허물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空함을 알면 어디에도 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無咎無法 不生不心 能隨境滅 境逐能沈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생멸도 없고 마음도 없다.
능[주관]은 경[객관]을 따라 멸하고, 경은 능을 좇아 잠긴다.

여기서 法은 제법무상의 법, 이를 테면 만물과 만물을 통섭하는 모든 기틀을 말합니다.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다는 말씀 속에는 幻으로 이루어진 법의 세계를 바라보는 초월적 통찰이 있습니다. 不生不心을 생멸도, 마음도 '없다'로 번역하였으나 실은 생멸변화를 초월하였기 때문에 不生이며, 그렇다면 굳이 마음이라 할 것도 찾을 수 없으므로 不心입니다. 마음을 찾을 수 없는데, 주관 객관이 어디 붙을 자리가 있겠습니까? 주관이 멸하면 객관이 따라 멸하고 그 逆도 같습니다.

境由能境 能由境能 欲知兩段 元是一空
객관은 주관을 말미암은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을 말미암은 주관이다.
양단을 알고자 하면 원래 하나의 空이다.

앞에 이어서 주관 객관의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양단은 주관/객관, 선악, 시비, 眞妄 등 모든 상대적인 것이 양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가 무너지면 나머지도 무너져 남아 있을 것이 없으니 필경 하나의 空일뿐입니다.

一空同兩 齊含萬象 不見精麤 寧有偏黨
하나의 공은 둘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가지런히 포함한다.
정과 추를 보지 않나니 어찌 편당이 있겠는가?

하나의 空인 줄 알았으면 거기서 兩段이 살아납니다. 주관 객관만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모두 포함되어 가치와 자기 생명을 지니고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이 萬象의 정밀한 것과 거친 것의 차이를 보지 않는다는 것은 가치와 공능功能을 똑 같이 서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치우침이 있을 리 없지 않겠습니까?

大道體寬 無難無易 小見狐疑 轉急轉遲
대도는 그 체가 너그러워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건만,
작은 견해로 의심하고 의심해서 급하게 할수록 더욱 더디어진다.

우리가 공부하는 모습을 승찬 스님이 훤히 들여다 보고 말씀하십니다.

執之失度 必入邪路 放之自然 體無去住
집착하면 법도를 잃어버려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선다.
놓아버리면 저절로 그러함이니 자체에 가고 머뭄이 없다.

佛道란 깨닫고자 함에 목표를 두는데, 그것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집착하면 삿된 길로 빠진다 합니다. 부처님께서 내 法은 독 있는 뱀이니, 숙련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신 것은 이것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놓아버리면 감도 없고 옴도 없고 머뭄도 없어, 저절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任性合道 逍遙絶惱 繫念乖眞 昏沈不好
성품에 맡기면 도에 합하여 소요자재히 번거로움을 끊는다.
생각에 매이면 참에서 멀어져 혼침의 어려움을 겪는다.

무비 스님에 의하면 불경 공부를 열심히 하시고 신심명 쓰는 것으로 수행을 삼았던 글씨 잘 쓰는 스님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 호가 任逍山人이었다 합니다. 본성에 맡겨 도에 합하고, 자재하여 번뇌를 끊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므로 거짓 나에 반연하여 일어나는 생각을 끊고 혼침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수행하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길입니다.

不好勞神 何用疎親 欲趣一乘 勿惡六塵
좋지 않은 것과 정신을 수고롭게 하는 것에 멀고 가까움이 무슨 소용인가.
일승에 나아가고자 하면 육진을 싫어하지 말라.

不好는 앞의 昏沈을 말하고, 勞神은 繫念을 지칭합니다. 생각에 얽매여 망상을 많이 하면 참됨으로부터 멀어지는데 이것을 계념괴진이라 했는데, 이로써 정신이 수고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혼침과 계념은 둘 다 공부와 멀리할 것이며 어느 것을 가까이 하는 것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一乘이란 법화경에서 말하는 佛乘,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사람이 그대로 부처이고 이 현실 六塵境界가 그대로 청정법신의 세계여서 어느 것 하나도 배제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六塵不惡 還同正覺 智者無爲 患人自縛
육진을 싫어하지 않으면 또한 정각과 같다.
지혜로운 사람은 굳이 조작하는 바가 없거니와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묶인다.

육진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아니다, 마음이 아니다' 하면서 육진경계를 배제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정각이 바로 육진경계를 나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데서 온다는 것입니다. 무위라는 말은 풀이하기가 어려운 말입니다. 반대는 有爲인데 무언가 조작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을 어떻게 해서 정각을 이루려는 조작이 없다는 말입니다. 깨치려는 마음을 갖고는 깨칠 수 없다는 말씀이니 공부를 다시 돌아다 보게 합니다.

法無異法 妄自愛着 將心用心 豈非大錯
법에는 다른 법이 없는데, 망령되이 스스로 애착한다.
마음으로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그르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異法의 異는 다를 이 자인데 여기서는 특별하다, 뛰어나다 의 뜻이라 합니다. 마음으로 마음을 쓰는 일은 마치 물로써 물을 씻는 것과 같아서 부질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迷生寂亂 悟無好惡 一切二邊 良由斟酌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깨달음에는 좋고 싫음이 없다.
일체 이변은 진실로 짐작을 말미암는다.

마음의 이치를 모르면 고요하니 어지러우니 하는 일들이 마음 속에서 시끄럽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모든 치우친 생각이 二邊입니다. 그러나 실사 이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상대적으로 있다고 마음 속에서 짐작할 때 비로소 이변이 됩니다. 그래서 양유짐작이라고 했습니다.

夢幻空華 何勞把捉 得失是非 一時放却
꿈이요 환이요 헛꽃인 것을 어찌 수고로이 잡으려 하는가,
득실과 시비를 일시에 놓아버려라.

어떻습니까? 우리가 잡고 애지중지하는 것 중 허망하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 허망한 것들을 잡지 말고 놓아버리는 것이 큰 지혜입니다.

眼若不睡 諸夢自除 心若不異 萬法一如
눈이 만약 잠들지 아니하면 모든 꿈이 절로 사라진다.
마음이 만약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일여하다.

잠들지 않으면 꿈은 아예 없습니다. 마음이 다르다고 여기지 않으면 만법이 일여하여 차별 없음이 이와 같이 자명하다 할 것입니다.

一如體玄 兀爾忘緣 萬法齊觀 歸復自然
일여한 체는 깊고 깊어서 올연히 인연을 잊는다.
만법을 가지런히 보면 저절로 그러함에 돌아간다.

한결 같다는 그 본체는 참으로 깊고 깊다고 하였습니다. 블랙홀의 깊이를 예로 들면 이해가 빠를까요? 그 안에서 모든 존재의 차별이 다 없어지지요. 과학용어로는 Singularity라고 합니다. 緣이란 존재를 의미하는 말과 같습니다. 현현한 一如의 本體 속에서는 모든 존재의 차별성이 사라지므로 올연하다 했습니다. 만법을 가지런히 본다는 말은 만법일여나 같은 말입니다만, 여기서는 본다는 데에 큰 뜻을 둡니다. 倒錯 없이 바로 보는 것만으로 스스로 그러함에 돌아갑니다.

泯其所以 不可方比 止動無動 動止無止 兩旣不成 一何有爾
그 소이를 없애면 견주어 비할 데가 없다.
그침 가운데에서 움직이면 움직임이 없고 움직임 가운데에서 그치면 그침이 없다.
두 가지가 이미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하나인들 어찌 있을 것인가.

所以는 꼬투리라고 풀이합니다. 간택하는 꼬투리, 無明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씨앗입니다. 앞 연에 이어 풀이하면 스스로 그러함에 되돌아와 [歸復自然] 그 꼬투리를 없애버리니 바야흐로 차별하고 비교하는 일이 없어집니다. 그침과 움직임을 말한 것은 動, 靜의 중도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움직여도 움직임이 아니요, 그쳐도 그침이 아닌 것이 저절로 그러함입니다. 앞에 나왔던 '止動歸止 止更彌動 唯滯兩邊 寧知一種' 과 견주어 보면 꼬투리 있음과 없음에서 오는 차이가 역연할 것입니다. 그래서 둘이면서 둘이 아니고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닌 중도의 입장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결국 하나마저 없는 자리입니다. 이 구 시작하는 바로 앞에 已던 異던 ‘이'음을 압운으로 하는 사언구 2구 8자가 추가 되었으면 짝이 맞을 터인데 아깝게도 전해지지 않습니다. 청담 스님은 한참 뒤인 ‘無在不在 十方目前’ 뒤에 ‘非古之今 三世一念’이라는 8자를 넣는 것이 어떤가 의견을 내신 적이 있으나, 추가 한다면 이곳이어야 한다는 것이 내 의견입니다.

외람되지만 내 의견을 적어보면

'萬法齊觀에 歸復自然이라' 다음에 아래와 같이 2句 8字를 삽입해 봅니다.
새해 벽두 해인사 용맹정진 다녀오다 얻은 구절입니다.

體無來去하며
法非各異니
[(스스로 그러함에 돌아옴으로)
본체는 오고 감이 없으며,
법 (또한) 제각기 다름 아니니]

이렇게 해서 이어지는 '泯其所以하여 不可方比니라'와 짝을 이루게 하면
歸復自然을 직접 받는 것보다 뜻이 잘 이어지지 않나요?

하기는 청담 스님도 빠진 구절 찾아 넣으시려다 성철 스님한테 어림없는 짓이라고 눈흘김 받았다는데,
언감생심 한문, 불학 모두 연천한 내가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도 우습네요.
언젠가 때에 이르면 누구 꿈에든 3조 승찬 화상 현몽하셔서 바로잡아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究境窮極 不存軌則 契心平等 所作俱息
구경이요 궁극이라 궤칙을 두지 않는다.
마음이 평등한 데 계합하면 짓는 것이 다 쉬리라.

그 자리가 구경이며 궁극이므로 무어라 정한 법칙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평등한 데 계합하게 하면 무엇을 하더라도 차별하는 마음을 짓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짓는 것이 다 쉰다고 한 것입니다.

狐疑淨盡 正信調直 一切不留 無可記憶
의심하고 의심하는 것이 깨끗이 다하면 바른 믿음이 조화롭고 곧다.
일체를 머물러 두지 아니하여 기억할 것이 없다.

자꾸만 고개를 드는 의심이 깨끗이 없어지면 바른 믿음, 즉 지극한 도가 현현하여 조화롭고 곧다 한 것입니다. 비교와 갈등을 하지 않는 것이 일체불류입니다. 차별상에 머물러 있지 않으므로 마음에 새겨두는 것도 없습니다.

虛明自照 不勞心力 非思量處 識情難測
텅 비어 밝고 스스로 비추어서 마음의 힘을 수고롭게 하지 않는다.  
사량할 곳이 아니니 식정으로 측량하기 어렵다.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기억이라는 마음의 찌꺼기가 없으면 텅 비고 저절로 환하게 비추어서 아무런 마음 쓸 일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着이 떨어진 곳의 '보는' 이야기입니다. 금강경의 사구게 '모든 형상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니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보면 바로 여래를 본다.' 思量과 識情을 어느 순간 넘어서는 開眼을 말합니다.

眞如法界 無他無自 要急相應 唯言不二
진여 법계에는 타인도 없고 자신도 없다.
급히 상응하기를 바란다면 오직 둘이 아니라고 말할 뿐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떠났으니 남도 없고 나도 없습니다. 하심회가 모이고 있는 곳이 불이선원입니다. 이 불이선원의 이름은 원융 스님이 붙이시고 얼마 전에 돌아가신 석주스님께서 현판을 써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원융무애한 삶에 급히 상응할 일이 있겠습니까마는, 굳이 한마디로 말하여야 한다면 不二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하는 것이 이 귀절의 내용입니다.

不二皆同 無不包容 十方智者 皆入此宗
둘이 아니면 다 같아서 포용하지 아니함이 없다.
시방의 지혜로운 사람들이 모두 이 종지에 들어간다.

不二라는 말은 유마경의 입불이법문품이 그 원조라고 하는데, 유마거사의 '입을 닫은 법문'이 유명합니다. 유마경을 참조하셔서 不二의 뜻을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불이가 포용하지 않는 바가 없으므로 모든 지혜로운 자들이 이 종지로 들어옵니다.

宗非促延 一念萬年 無在不在 十方目前
종지는 짧거나 긴 것이 아니니 한 생각이 만년이로다.
있고 있지 않음이 없어서 시방이 목전이로다.

둘이 아닌 이치를 '이 宗旨'라고 했습니다. 중도의 경지, 원융하고 조화로운 경지는 시간, 공간으로 측정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한 생각은 한 순간의 뜻입니다. 一念卽是無量劫 無量遠劫卽一念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있고 없음이 사라지는데, 공간적 거리는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極小同大 忘絶境界 極大同小 不見邊表
지극히 작은 것과 큰 것은 같아서 경계가 모두 끊어지고,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서 가장자리와 표면을 볼 수 없다.

동기회 홈에 올려져 있는'극대의 세계/극미의 세계'가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현대과학이 지금 알게 된 사실을 어떻게 이들 선사들은 사유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을까요? 쿼크가 존재하는 기간은 10의 -28승 초라고 하네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신심명에서는 유/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네요.

有卽是無 無卽是有 若不如此 必不須守
있는 것은 곧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지 아니하면 모름지기 지킬 것이 아니다.

중도가 아니면 佛道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마다 지녀 가지는 것이 달라서 세상에 통용하는 불교는 아마 불도의 수만큼이나 많을 것 같습니다. 그 판별의 기준이 바로 중도입니다. 중도 역시 문자로 이름하여 이를 설명한 것뿐이며 그 원리는 바로 '유즉시무 무즉시유'의 안목과 지혜라는 것입니다.

一卽一切 一切卽一 但能如是 何慮不畢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다.
다만 이와 같이 된다면 어찌 마치지 못함을 염려하겠는가?

'일즉일체 일체즉일'의 중도 원리를 자기 견해로 굳히면 공부를 마치지 못할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信心不二 不二信心 言語道斷 非去來今
신심은 둘이 아니며 둘이 아닌 것이 신심이다.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과거 미래 현재가 아니다.

믿는다는 것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둘이 아닌 마음이 신심입니다. 신심은 신앙과 달라서 바로 이것이 중도이며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천주교의 믿음과 불교의 신심이 다른 것은 Belief 와 Conviction 의 차이라고 지적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말이 끊어진 곳에 길을 놓으신 승찬 스님께 절합니다.

09.3.23 정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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