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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자의 겉핥기 인생 - 화공회보99 기고
 집주인  12-08 | VIEW : 17,565



바보 같은 짓인 줄 알지만, 아침 눈뜨고 책상 앞에 앉으면 그저 습관적으로 하게 되는 일이 있다.
PC에 스위치를 넣고 물끄러미 모니터를 들여다본다. 오거리 구멍가게 주인이 가게 덧문 열듯이 아무 감흥 없이 Internet Explorer에 더블클릭, 형광등 껌벅이듯 그런 짧은 망설임 후에 화면이 뜨면서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브룩벤튼이 부르는 Think Twice. 사연이 있다면 있는 내 홈페이지의 배경 음악이다.
오늘 아침의 Visitor Count는 3626, 흥 그래도 엊저녁 한 너댓명은 들어왔던 모양이네.
Guestbook을 연다. 무어 대단한 손님의 감격스러운 흔적이 남아 있길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으면서도 대체로 가벼운 실망. 낚시 밥만 떼운 서툰 강태공 심사가 그러할까. 애초부터 고기 잡을 마음은 없었더라도 말이다.
그래도 오늘 아침에는 운이 좋았다. 워싱턴 사는 조카녀석이 추석 안부 인사를 보내왔으니.

98년 初, 아직 경영직에 있을 때의 얘기다.
조직 개편이 있던 날, 한급 높아진 부사장이 되었다며 두 명의 상무급 임원을 밑에 두게 되자, 원래 맡기기 전문인 나로서는 시간이 주체할 수 없이 남아 돌아가게 되었다.
머지않아 은퇴할 날이 다가올 테고(족집게 무당으로서, 과연 같은 해 말 경영직을 은퇴하였다) 그렇다면 내 손으로 PC 정도야 다룰 수 있어야 않겠냐고 욕심을 낸 것이 MS Office 공부, 인터넷 공부로 접어들어, 마침내 98년 2월 19일 개인 교습 선생인 IT Team장이 만들어준 표지 한 장과 거기 연결된 공짜 Guestbook, 그리고 내가 自力으로 html을 써서 작성한 이력서 한 장을 붙여 내 홈페이지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거기다 며칠 걸려 가족 사진 scan해 넣고, 가족 소개 써넣고 만만세, 만방에 홈페이지 개설을 고하여 네티즌 되었음을 신고하였는데,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니 자다가도 소가 웃을 일이다.
내 밑에 근무하는 직원들이야, 아, 부사장님 대단하십니다! 어쩌고 칭송이 대단했지만 그 정도야 나도 가려 들을 줄 알지. 늙은이 깜냥에 그 용기가 가상하다는 정도의 얘기 아니겠나?
도무지 어느 누가 찾아올 이유가 없는 홈페이지란 自覺이 나를 서글프게 했다.
나를 아는 사람은 구지 홈페이지 아니라도 내 신상명세, 가족상황쯤이야 이미 아는 것이고, 또 점잔은 사람이 뭐 남의 솥 단지 몇 개인 것까지 샅샅이 알아 뭘 하나?
더더구나 모르는 사람이야, 아무리 할 일 없기로서니, 어떤 놈인지 코빼기도 모르는 놈, 신상/가족명세서 읽느라고 돋보기 쓰고 PC 들여다보고 있을 쓸개 빠진 네티즌이 있을라고…
자! 그러나 그렇다고 애써 열은 홈페이지의 문을 닫는다면 내가 허달이가 아니지.
그렇게 내 철학적 고민이 시작되었다.

벤치마킹, 표절을 그렇게 근사하게 부르는 이름이 있다고 해서 경영이 어쩌네 하고 주접 떨 때 많이 써먹어 본 말이다.
인터넷 상에서는 표절 시비가 없다고 해서 마음 놓고 Web 속을 헤매어 보았다.
도대체 어떤 분들이 어떤 개인 홈페이지를 은밀하게 Cyber Space 한 구석에 거미줄 치듯 쳐 놓고, 도대체 어떤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까?
음란물 Site로부터 입자물리학자, 거룩한 명상자의 Site까지…
대충 짐작이 가시겠지만 그 여행의 결말 역시 비참했다. 그럴싸한 홈페이지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나누어 줄 것이 있는 사람들의 나눔의 장터였다는 것이 나의 발견이었으므로...
자기가 개발한 Software를 무료로 나누어 주는 Programmer, 연구결과를 다른 연구자들과 나누며 그 의견을 듣는 과학자들, 명상의 깊이와 영적 체험을 나누는 賢者의 Site등.
게으른 자의 겉핥기 인생을 살아온 나 같은 아류야 어디 남과 나눌 가치가 있어야지. 내가 끼어 들 여지는 이 미개척지라는 Cyber Space에도 없어 보였다는 것이 처량하지만 솔직한 감상이었다.
도대체 무얼 들여다보며 살아온 것일까? 50여 생평을… 나는 부끄러워 하면서 되돌아 보았다.
아마도 이 성찰이 내가 인터넷 홈페이지 만들기를 시도한 후 얻은 첫 번째 귀중한 얻음이 아닐는지.

게으르기를 즐겨하나
친구는 사양하기 어려워 (好懶難辭友)
궁색한 줄 알지마는
어찌 그냥 넘어 가기를 바랄손가 (知窮豈念通)
가난하다 해도
찌든 삶은 살지 않았고 (貧非理生拙)
병 들어
마음 기른 공을 깨닫네 (病覺養心功)

작은 밭은 능히
손님 머물게 할만 하고 (小苗能留客)
푸른 하늘은
나르는 기러기를 싫증내지 않네 (靑冥不厭鴻)
가을 배 돛 올려
가(賀)씨 노인 방문 길 (秋帆尋賀老)
술 싣고
강동을 지난다 (載酒過江東)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이며 서예가인 米 元章이 쓴 詩 초계시권에서 한 편을 뽑았다.
게으른 인생이었으나,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했으니 억지 춘향이라고 나도 무언가 나눌 것이 없을는지?
다 늦게 한문 공부한답시고 四書 중 大學을 펼쳐 든 것이 89년이었던가, 그렇게 만난 한문선생/서예선생과의 교분도 그러저러 십년, 역시 겉 핥기 공부였으나, 술 먹고 雜論하는 재미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느날 옛 상사이던 한 분이 영문으로 된 불교 입문서를 보내 주셨다. 읽어보니 어려운 한문으로 읽어 알 듯 모를 듯 답답하던 불교 이론이 한 눈에 명료하다.
아, 한문으로 볼 것과 다른 글로 볼 것이 따로 있구나, 그런 깨우침도 누가 관심 있다면 나누면 어떨까.
공과대학 입학을 시작으로 계산자와 유효숫자 세자리 인생이 시작되었는데, 취직해서 공장설계랍시고 하다 보니 어려운 공식으로 애써 구한 유효숫자의 정확도와 자부심이 이런 저런 allowance (예컨데 corrosion allowance, safety allowance, 게다가 상업적으로 available한 철판 두께는 다음 얼마 짜리 밖에 없다는둥) 때문에 뭔지 모르게 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무얼 들여다보고 살아야 할지, 과학 만능 세대라니 과학자들 하는 짓을 훔쳐 보니 그것도 가관이다.
20 세기 인류의 커다란 성취라는 Hubble 망원경을 위성 궤도에 올려놓고 주야로 우주 저 깊숙히를 들여다보던 과학자들이 마침내 우주의 나이가 120억년에 불과 (과거에는 150억년) 하다는 추론을 발표하자 난감한 천문학자, 천체물리학자가 무더기로 생겨난다.
필생의 연구가 무너지는 소리에 억장도 무너진다는 얘기다.
한편으로는 Fermi 연구소니, CERN이니 하는 거대한 입자가속로를 만들어서 우주의 기원을, 물질의 본질을 찾아 보겠다는 참으로 가상한 목표를 세워 놓고 一路 매진 중인데, 자꾸만 새로운 입자는 발견되는데 아마도 본질 그것은 입자가 아닐 것 같다는 얘기며, 그런 본질을 꼭 물질 속에서만 찾는다고 찾아질지 보장도 없어 보인단다.
차라리 佛書 起信論을 들여다보면, 지름 수 km 총길이 수십 km된다는 씽크로트론 여러 수 백억불 들여 만들지 않고도 眞如門과 生滅門의 이야기가 matter / antimatter 이야기보다 수승(殊勝)한 것 같아서 본질을 다루는 논리로 그럴듯 해보이며 그러면서도 일단은 과학처럼 open end 가 아닌 나름대로의 결론을 준비하고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백수십억년의 우주 역사, 무한 소립자의 세계, 유전자의 비밀, 이런 것들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현대 과학으로도 불과 5000년 전의 인류역사를 재구성하는 데에는 異見이 많아서 어떤 과학자는 태양계는 1000년 단위의 Time Span으로 볼 때 안정된 界가 아니며(violent하다는 얘기) 예컨대 금성이 5000년 전에 지구와 near miss 과정을 거쳐 태양계에 capture 된 혜성이었다고 말하는데 (Velikovsky Catastrophy 이론), 다른 정통과학자들은 그런건 Pseudo Science다 하고 매도하면서도 현대 과학으로 풀 수 없는 예외 현상들을 설명할 이론이 마땅치 않아 (금성 탐사선이 금성에 도착해 보니 그 표면온도가 Greenhouse Effect로 설명 가능한 온도보다 훨씬 높아 오히려 Velikovsky의 추정온도가 더 가까웠다고 한다) 다툼이 계속되고 있다.
어떤 진보적 생물학자( Rupert Sheldrake)는 gene만 가지고는 생물의 형태를 결정하는 요인을 설명할 수 없으며, 축적된 기억, 습관 이런 것들이 형태생성의 場(Morphogenetic Field)을 만들어서 생물의 형태와 진화가 결정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佛書의 唯識論에 나오는 제8 貯藏識(아뢰야識)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그런데다 이런 공부들이 종합되어 진리를 추구하는데 쓰여지는 일 없이 제가끔 뿔뿔이라니, 원… 잘난 분들은 나날이 불어나고, 쉬운 진리는 나날이 멀어져만 간다. 다 보는데 집착한 때문이다.
(과학자들 중에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Society for Scientific Exploration같은 것을 만들어 Journal을 발간하기도 하고 활동들을 하고 있기는 하다.)
자! 이런 불평, 잡학들이라도 나눈다고 담아본다면 누군가 있어 나눔이라고 생각할는지.
그런 뻔뻔스러움으로 홈페이지의 contents를 늘려보았다.
취미 삼아 모은 서예 작품과 法帖 목록도 혹 남과 나눌 수 없을는지.
혹 읽기도 하고 혹 그저 꽂아 놓기만 한 책들 목록 올려 놓았으니, 빌려 갈 사람 빌려 가시고.
자랑 삼아 실어놓은 Wine Collection List, 이것도 혼자 마시면 뭘 하나? 내 놓으라고 어느 친구 놈들 들이 닥치면 나눌 밖에…

또 무얼 담아 볼 것이 없을까?
이름 그대로 홈페이지라면 가족들과 나누기 위해 돌아가신 분들의 기록을 좀 올려 놓으면 어떨까?
이렇게 해서 아버님의 詩, 아버님의 足跡,그것을 찾아 70여년 전 기록을 뒤져 준 Roanoke College (Salem, Virginia 소재)의 고마운 Archivist, Lynda 아주머니와의 交信 내용도 올리게 되고, 우리 아이들(그리고 형님네 아이들)의 대대적인 호응을 얻게 되었다.
아버님 詩를 올려놓게 되자, 아버님 친구 분의 詩도, 내 친구의 詩도, 좋아하는 禪詩도 의당 한자리를…
기왕이면 아내의 페이지도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우선 사진 몇 장만 올려 놓고 지금으로서는 후일을 기약한 셈이다.

자!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내 홈페이지가 싫던 좋던 Cyber Space 한구석(http://www.dahlhugh.com)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허망한 얘기로서 내가 내 命 다 살고 어느날 누더기로 돌아갈 때, 이걸 남겨놓고 갈 것인가 다 지워버리고 갈 것인가 아직 결정을 유보하고는 있지만, 꼭 무언가를 들여다보는데 취미가 있으신 분이 계시다면, 아직 거기 있는 동안에 한번 다녀가셔도 좋겠지.
수줍은 분이라면 구지 Guestbook에 Sign하지 않으시더라도 상관치 않을 터이니.

1999.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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