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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글 - 쌩뻬르의 산책로
 집주인  12-08 | VIEW : 1,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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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회관회 뉴스 44호 1987.6.30 / 회원기고]

아침에 창문을 열면 거리의 소음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쌩뻬르가街, 몇 세기 전 마차馬車의 통행을 위해 마련된 좁은 거리의 그 똑같은 포도舖道 위에 쎈느강江을 카르젤 다리 위로 건넌 자동차의 물결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4층. 열평이 못되는 내 작은 공간空間으로부터 현관까지 이르는 나선累線의 나무 계단은 가운데가 둥글게 닳아 파이도록 낡아 언제나 유쾌히 삐걱이고,
계단을 돌며 창 밖에 시선을 던지면 늘 마주치는 맞은편 아파트의 보자르미술학교 여학생들이 풋과일 같은 나신裸身으로 화판畵板 앞에 서서 낯익은 얼굴에 스스럼없이 손을 흔든다.

이 거리에서, 가로수와 함께 호흡하고, 때로는 견딜 수 없는 밤의 냉기冷氣와 타협하며 옹송거리고 잠들며, 두 집 건너 배불뚜기 아줌마 가게에서 산 바겟뜨 빵을 비둘기와 나누어 먹고 살았던 83년 여름부터의 일년 여餘는 돌아다 보면 내겐 감당하기 어려운 축복이었다.
빠리의 아름다움은 이맘때면 룩쌍브루, 뚜일러리 공원에 만개한 마로니에의 장관壯觀에도 있고,
샹젤리제를 수놓는 별빛 같은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에도 있으며,
어느 우울한 가을날 회색빛 우중충한 하늘이 걸려있는 거리의 6층 지붕 위에도,
봄안개 피어 오르는 이른 아침의 블로뉴 숲 속에도 나뉘어 담겨있지만,

수업 마치고 돌아오는 길 모퉁이에서 마주치는 라씬느의 기억,
쌩제르펭데프레 교회 앞에서 늘 단정端正하던 떼까르뜨의 그림자,
언제까지나 수리중修理中이던 자신의 기념미술관 앞에 선 델라끄로아의 회상回想,
데마고 까페 구석진 나무 의자에 앉아 느껴보는 으슥한 밤의 싸르뜨르, 보브아르의 체온,
이렇듯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또 두려워하던 이들의 영혼과 나의 오늘이,
지척에서 생생한 현실로서 문득 조우遭遇하는 환상幻想의 불가사의함에 비길 바 아니다.

수업 없는 날의 나의 발길은 늘 보자르 미술학교 뒷 길인 쌩빼르가街를 빠져 나와 쏀느강변江邊으로 향하곤 하였다.
카루젤 다리 위에 서서 흐르는 쎈느江의 물결에 이유 모를 한숨을 실어 보내기도 하고 때로는 바또-무슈 즐거은 선객船客들에게 깃발처럼 손을 흔들어 보내기도 한다.
더 걸으면, 늘 드나들어 익숙한 루브르, 끝없이 어우러진 꽃밭과 수많은 조상彫像이 사열하듯 이어선 마로니에 숲의 뚜일러리 공원, 분수 앞 벤취에 앉으면 비둘기는 퍼덕이며 날아 오르고 장난감 돛단배를 연못에 띄운 아이들의 외침, 햇살에 구슬처럼 번쩍이며 부셔져 내리는 물방울 사이로 저만치 오벨리스끄와 개선문이 겹쳐 보이며 샹제리제의 호사로운 인파 사이로 나를 유혹해 내곤 하였었다.

그럭저럭 일년, 돌아오기 전의 한 두달은 나는 이 모든 것을 기필코 담아가리라는 터무니없는 열병에 가슴을 태우며 지내고 있었다.
레인코트 깃을 세우고 거닐던 안개비 내리던 뱅쎈느 숲,
두손으로 감싸든 까페오레 잔盞의 온기溫氣에 몸을 녹이고 그 기억할 수도 없는 상념想念들을 묻고 또 묻어버리던 안개자욱한 호수,
되풀이해 돌아보던 오랑쥬리의 미술관이며 블로뉴숲의 모네기념관,
어느 것인들 추억이야 아닐까.
몰리에르의 희곡에 찬탄讚歎하던 코메디 프랑세스,
샤뜰레레일의 유쾌한 식당 레삐에드고숑,
솔본느 건너편 침침한 층계를 내리면 촛불 밝히고 앉아 즐기던 그 기막히게 맛있는 양고기집.

어늘 날의 늦은 저녁, 나는 조명 은은한 쌔제르망데프레 종탑鐘塔이 내려다 보고 있는 거리에 어우러진 음악회, 거리의 인형극, 불을 먹는 마술사들을 물끄러미 바라다 보며 걷다가 문득 깨달았던 것 같다.
이들의 털끝만큼도 나는 가져 갈 수가 없다.
가슴 아프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 모든 아름다움은 진실로 이곳에만 서식棲息하는 속성을 가졌으므로...
자연이 있었으며, 창의創意로운 선인先人이 있었다고 했다.
그들의 이야기와 족적足跡이 그들을 흠모하는 이들의 간단間斷 없는 숨결 속에서 투명해져 간다.
그들의 비탄悲嘆과 절망마저도 흐르는 쎈느江 위에 점멸點滅하다가 주름 잡힌 시간, 사랑과 함께 짠 직포織布의 놀라운 색채色彩가 되어 빛난다.
이것들이 어김없이 되돌아 와 허공을 배회하다가 가로등 불 밑에 춤추는 거리의 마술사와 문득 하나가 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느 하나도 가져갈 수가 없다.

텅 비어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어느 짐엔가 묻어 온 2호짜리 조그마한 몽마르뜨의 유화油畵 한 점, 젊은 거리의 화가였었지, 헝크러진 붉은 색 머리와 푸른 눈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빠리는 담아 올 수 있는 것은 아니었었다.
그림을 손질해 선반 위에 얹으면서 눈을 가늘게 떠서 담담한 얼굴을 짓고 입속말로 뇌어 본다.
쌩뻬르의 그 감미甘味로운 회상回想의 산책로散策路.

1987.5.25
집주인
18년이 지난 2005년 5월
로마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내와 빠리에 들려
쌩뻬르의 산책로를 함께 걸어보았다.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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