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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올라가는 계단
 집주인  02-28 | VIEW : 604
6년 전쯤의 일이다. 어쩌다 술좌석에서 호(雅號)니, 낙관(落款)이니, 도서(圖署) 이야기가 나와서, 필자가 인사동 구석 드나든 경험 믿고 술기운에 흰소리를 쳤더니 김광규 시인이 부탁했다.
거북이 한 마리를 그려 넣고 그 안에 ‘느린’이라고 글자를 넣어 자신의 낙관용 도서를 하나 만들어 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흔연히 응락하고 낙관 값 미리 쳐서 마셔 대취(大醉)한 뒤 헤어졌는데, 그래도 몇 개월 지난 뒤 어렴풋이 그 약속한 일이 기억나기에 필자가 전에 동문수학하던 현천서실의 수제자 한계(寒溪)에게 부탁해서 새끼손톱 반만한 크기의 작은 거북이 낙관 사각 인장을 하나 새겨 받았것다.

직접 각(刻)을 한 한계의 말을 빌리면 거북이 모양이 아무렇게나 그려 넣은 것이 아니요, 중국 고인(故人)의 어느 옛 낙관에 전거(典據)를 두고 따온 것이라 하던데, 그럴 싸 해서 그런지 문양(紋樣)이 앙징 맞으면서도 또 단아(端雅)한 맛이 있어 시인에게 알맞은 선물이 된 것 같았다.

문제는 김 시인이 자신의 호(號) 삼아 굳이 넣어달라던 ‘느린’이라는 문구였는데, 낙관, 도서가 단독으로서도 하나의 예술품임을 감안한다면 그 요청은 도저히 받아들일 길이 없어 내가 과감히 이를 묵살하였던 기억이 있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하고 보니 책상 위에 ‘느린’ 김광규 시인이 보낸 우편물이 하나 와 있다.
열어보니 그의 산문집 ‘천천히 올라가는 계단’.

‘느린’ 그가 ‘천천히’ 어디로 올라가는 계단인지는 책 읽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옛날 식이라면 출판된 책 뒤에 인지 붙고 작가 도장도 찍곤 했는데 하고, 혹시나 내가 마련해 준 거북이 도장 찍혔나 뒷 표지 헤집어 보다가 ‘그러면 그렇지’ 제풀에 맥 빠진 웃음을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지은이와 협의하여 인지는 붙이지 않습니다’ 선언하는 문구가 나를 째려보는 것 같았다.

빨리빨리, 생략할 것은 생략하고 그렇게 사는 세상이 된지 오래다.

이것도 오래된 일로, 당시 북경 주재원으로 있던 아들 집에 갔다가 모처럼 한가한 날, 아들과 둘이 밤늦게 앉아 ‘Click’이라는 제목의 영화 한편을 함께 본 일이 있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에만 몰입하고 사는 [영화 소개 표현을 따르면 칠칠치 못한 일 중독자] 어느 건축설계사의 일생을 패러디 한 작품인데 인생을 요소요소에서 클릭(click)하여 어떤 부분은 생략(skip)하기도 하고 빨리감기(fast forward) 할 수도 있는 기막힌 리모콘[원격조정장치]을 얻게 된 주인공이, 결국은 성취하지 못하는 삶(unfulfilled life)을 살게 되었다는 교훈적인 코미디였다.

영화 속의 주인공(아담 샌들러 扮)이 지난 날 내 모습 같기도 하고, 오늘의 내 아들 놈 같기도 해서 둘이 마주 보고 웃었는데, 아마도 웃음의 내용은 서로 달랐을 것이다.

최근 수년래 무언가 먹거나 마시다가 사래 드는 일이 잦아졌다. 필자만 그런가 했더니, 나이 들면 다 겪는 피할 수 없는 증상이라고 한다. 목젖 움직이는 반응속도가 늦어져 기도(氣道)를 막는 동작이 부실해져 생기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어찌 먹고 마시는 일에만 그럴 것인가, 아마도 몸의 기능 저하에 적응하지 못하는 마음의 습관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곳 여기저기서 우스꽝스러운 이상(異狀) 증상을 나타내고 있을 터이다.

70 평생을 빨리빨리 서두르며 살아와, 이제는 천천히 올라야 할 계단 앞에 선 필자 세대는 지금 무엇부터 새롭게 익혀야 할지? 성찰질문으로 자문(自問)해보게 된다.

‘느린’ 생활을 진작에 살아온 김 시인에게 벤치마킹, 한 수 크게 배워야 할 모양이다.

[프라임경제 게재 201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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