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뺄셈의 미학 - 60동기회보 기고
 집주인  12-07 | VIEW : 11,388
essay1.jpg (62.0 KB), Down : 114


89년 뱀의 해. 막내딸이 열두살 되는 해였다.
회사의 社報 편집자로부터 신년의 소망과 설계를 몇자 적어달라는 요청을 받고
雜文 한편을 쓴 것이 생각나서 꺼내어 읽어보고 여기 소개한다.


덧셈은 끝났다.
밥과 잠을 줄이고
뺄셈을 시작해야 한다.
남은 것이라곤
때묻은 문패와 해어진 옷가지
이것이 나의 모든 재산일까
돋보기 안경을 코에 걸치고
아직도 옛날 서류를 뒤적거리고
.....
(중략)
.....
이제는 정물처럼 창가에 앉아
바깥의 저녁을 바라보면서
뺄셈을 한다
혹시 모자라지 않을까
그래도 무엇인가 남을까

(김광규의 시 [뺄셈]에서)


송년회를 겸한 김광규 시인의 출판기념회에서 돌아오면서
한해를 보내며 그래도 한 줄 시를 얻은 친구에 대한 부러움이 희미한 질투인 것 같아 부끄러웠다.

열심으로 한해를 살았노라고는 하지만 부쩍 키가 크고 목소리 마저 어른스러워진 삼남매三男妹의 대견함 외에 과연 얻은 것은 무엇인가.
세모가 어느새 깊어가고 내 뺄셈의 미학은 어렵기만 하다.

아주 오래된 일로 이제는 아무도 기억해 주는 분이 없겠지만,
당시 자신만만했던 젊은 부장이었던 내가 주제 넘게도 유공 여사원 모임인 <고리회>의 초청연사가 되어 고난苦難을 치러야 했던 때의 일이 기억난다.
무슨 말끝엔가 家訓 이야기를 끄집어 내었었다.
내가 나이 들어 가훈 같은 것을 하나 만들어 여봐란 듯이 거실벽에 걸어야 한다면,
'60년대 유행가 가사 제목을 하나 골라 써붙이리라.

"Think Twice."
부룩 벤튼의 그 감미로운 저음의 허스키를 기억하는 분은 기억하겠지.
기실은 연가戀歌였으나 가사의 내용은 아무래도 좋아.
적어도 한번은 상대방의 신발을 신고 서서 더 생각해 보자.
조금 억울한 듯 하더라도 Think Twice.
무너져 가는 가치관, 어디서부터 새로이 시작할 것인가,
교육과 나라사랑, 대를 물려서라도 우리는 틀림없이 성공해야 하는데, 아마도 이런 언저리에서 비롯된 發想이었겠지.
집에서부터 이것을 시작하기로 한다면,
오, 개구쟁이를 징벌하기 전에 엄마여! Think Twice.

세월이 흘러서 내가 나이들어 이제는 가훈 한줄을 멋지게 써걸어야 할 때가 되었건만,
이 말씀은 그마나 아직도 공염불에 지나지 못하고 있다.
우선 내가 준행遵行할 자신이 있어야지.
수범垂範의 어려움이 갈수록 무겁게 느껴지는 것만도 뺄셈에서 얻어지는 한가닥의 지혜라면 지나친 자위일까.

그러므로 새해에는 기필코 가훈 한줄을 부끄럼없이 써붙여 보리라.
뱀의 해에 큰 구렁이 꿈을 꾸고 막내딸을 얻었다.
덧셈 중이었으므로 주책이었고 욕심스러웠지.
저녁에 키를 대보니 막내 머리가 어깨 위로 솟는다.
간난이가 열두살이 되어 다시 맞는 뱀의 해에
가훈 한줄을 기어코 얻어보리라는 소망이
이제 소박하고 미소로운가, 아니면 가당찮은 더 큰 욕심인가.

- 후기後記 - 뺄셈을 계속하며 8년의 세월이 더 지나가고 작은 취미趣味를 하나 갖게 되었다.
이른바 서예書藝.
오다가다 만난 중국中國 서법사書法師 마광문馬廣文씨가 '愼思'라고 쓴 예서隸書 소품小品을 하나 주었다.  
愼思', Think Twice. 어쩌다 뜻이 그렇게도 잘 어울렸을까.
벽에 걸어놓고 바라본다. 이제 가훈 써 붙이기의 대망待望은 그럭저럭 이루어진 셈인가.
아이들도 다 크고 떠나갈 때 쯤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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